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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기록/출판시작전

멀티미디어와 시간의 흐름 속 육체의 의미

2008년 5월 13일

주제 : 영화예술 속 육체를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시선
과제 : 자신의 전공과 연계시킨 관점에서 바라본 주제를 글로 쓰기
 
멀티미디어와 시간의 흐름 속 육체의 의미

Prologue | 진화된 인터넷 속 자본주의 시선들, 육체를 바라보다?

 멀티미디어는 온라인 상에서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Time』지에서 2006년의 인물로 'YOU'를 지목하게 되었고 이제는 Web 2.0의 시대가 도래했다. Web 2.0은 기존의 웹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기업사이트에서 제공만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인터넷 유저가 웹에 참여하여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진화된 웹을 말한다[각주:1].  이런 환경 속에서 육체는 상품화된 다. 그것이 sex로서의 육체인지 gender로서의 육체인지 분류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섞인 컨텐츠가 범람한다. 육체는 지금 온라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으며, 육체를 상품화하는 것을 이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멀티미디어 속 육체는 결국 하나의 마케팅 아이콘 인 것이다. 
 인터넷은 포르노를 전송하고 제공하기 위해 빠르게 발전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시각적, 청각적 매체를 응집한 것인 멀티미디어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의 충족을 위해 육체를 내세운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로 인해 예전에는 음성적으로 퍼지던 육체의 상품화를 이제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TV를 틀자마자 여성이나 남성의 탄탄한 몸매를 내세운 광고를 접할 수 있으며, 강남대로의 고층 빌딩 전광판에는 팬티만 입은 근육질 남성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잡지나 인터넷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동성애 코드도 트랜드라는 바람을 타고 상업적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다. 이런 육체의 상품화는 잘 팔린다. 정말 잘 팔리기 때문에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걸러지지 않은 컨텐츠가 난무하는 웹 상이 아닌 특정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만들어 낸 작품에서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할까?


Main issue | 멀티미디어, 예술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

 영화 『시간』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마치 소모품 같은 물건처럼 취급한다. 주인공 세희는 지우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우가 자신의 '몸'에 질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새 물건을 사면 좋아하다가 낡아지면 새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처럼 보인다[각주:2].  그래서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처럼 바꾸어서 지우에게 새 것으로 나타나기로 결심한다. 또한 지우의 옛 친구인 여성도 "좀 낡았지만 날 가져." 라는 대사에서 자신의 몸을 낡았다고 표현한다. 이런 부분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몸을 소모품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각주:3].  이것은 Prologue에서 언급했던 멀티미디어 속 상업화된 육체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런 육체로부터 비롯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육체를 수술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끝이 난다. 
 또한 이 영화는 세희와 새희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을 통해서 '과연 육체는 특정한 인간을 식별하는 데에 있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가'하는 의문점도 가지게 한다.  나는 '영화예술과 육체' 수업 시간의 초반에 교수님의 "육체가 변하면 생각도 바뀌게 될까?" 하는 질문 앞에서 '분명 육체가 바뀌어도 나는 나이니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책과 영화를 거치면서 육체가 인간의 생각을 규정짓는 데에 정말 많은 영향을, 아니 거의 모든 생각을 규정짓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상품화된 육체를 보는가? 서울여성영화제의 국제학술회의 중 다케무라 가츠코 교수의 '응시와 생체-죽음 정치학'은 나에게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영화를 볼 때 관객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동일시하는 주체와 감정이 다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츠코 교수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분열은 생체 정치 하에서 성차별적 혹은 이성애중심적 형태를 취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탈피하는 영화로 『도그빌』을 소개했다. 포럼 참여 후  『도그빌』을 보았는데, 이 영화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보고난 후 아리송한 점이 많았다. 『도그빌』은 기존 영화처럼 세트장에서 촬영된 것이 아닌 연극무대 위, 벽 대신 분필선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촬영되었다. 이는 희생자이자 복수자인 여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에서도 평화로운 마을의 일상을 여과 없이 함께 보여주게 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기존의 희생자로서의 여성을 바라보며 자신을 몰입시키던 관객들에게 여성/남성으로 구분된 자아가 아닌 젠더로서의 주인공을 인식시킨다. 이것은 관객의 성구분과 관계없이 같은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시선이 특정 계층에만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 되는 한 이런 실험적인 영화는 계속해서 출현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영화 『도그빌』의 배경.
분필로만 그려진 마을은 관객이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모두 보게 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작년에 커튼 콜 된 영화 『이티비티티티 위원회』에서는 '행동하는 클리토리스(CiA)'라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를 만나면서 주인공이 변해가는 과정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의 몸 중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이 가장 많은 가슴을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부풀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영화의 이름도 '작은 가슴 위원회'라고 하여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신체조건이 어떤 것인지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우리 사회는 매일 쉴 새 없이 완벽한 몸에 대한 멀티미디어를 쏟아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쌍꺼풀 진 큰 눈, 하얀 피부, 날씬한 허리, 잘빠진 다리, 그리고 큰 가슴을 가진 여성들을 앞세워 '이것이 아름다운 여성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 속에서 이런 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아나의 언니이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가진 언니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식구들의 다정한 눈길을 받으며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레즈비언이며 언니보다 떨어지는 외모를 가진 아나를 대하는 식구들의 태도는 어딘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이에 대응하는 남성의 신체 기관은 남성의 성기이다. 영화 속에서 나중에 폭파되는 모뉴먼트 마운틴 앞 기둥탑은 남자성기를 상징하며,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이긴 남성들의 우월감과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주인공 아나는 이 기둥 탑을 폭파시킴으로써 지배욕구를 가진 남성들과 소수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한다. 여기에서 사회가 남성과 여성의 몸을 보는 시선은 판이하게 갈라져있다. 여성의 몸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져야 하는 물건으로, 남성의 몸은 지배욕구를 나타내는 상징적 기념물로 세워질 정도로 강하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바라본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가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이라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몸, 모두에게 요구된다[각주:4].  이것은 생물학적 성으로부터 나온 천편일률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사회적 성(gender)에 그대로 적용시킴으로써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스커트를 입고 남자는 바지를 입어야 하는 비교적 작은 관습에서부터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여성으로써 동성을 좋아하는 지 아니면 남성으로써 동성을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에서 야기되는 정체성 갈등은 한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이러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차별을 받는 소수 인권자가 되어 사회적 갈등을 발생시키는 데 지금 우리 사회는 전세계적으로 이런 문제점들이 얽히고 얽혀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영화 『이티비티티 위원회』 같은 해결책은 비현실적이기에 앞서 갈등만을 더 증가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어느 한쪽에 서서 반대편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파괴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만 있을 뿐이다. 서로 편을 가르고 못 잡아 먹어 안달이 난 모습은 갈등의 골을 깊게 할 것이니,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싸 안는 마음을 가져야 서로를 상처 주려 내뱉는 말들이 없어지지 않을까?[각주:5] 
 『미친년』에서는 이런 방법을 주장하고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여성을 위한 것으로 규정짓지 않고 인류를 위한 포용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와 달라 거슬린다며, 자신이 살아온 방법에 거스르는 일이라며 상대편을 배척하고 비난하지 말고 그냥 인정해야 한다. 세상엔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다양하고 나와는 극과 극으로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나는 이브 엔슬러의 백 명의 여성이 있다면 백 명이 다 아름답다[각주:6] 본문 중'>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여성의 외모를 특정한 기준에 맞춰 줄을 세우면 안 된다는 의미였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다양성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 명의 다양한 사람이 있다면 그 각자에게는 그 백 개의 기준이 존재할 것이다. 이 모든 기준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많은 갈등을 없애기 위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억눌려 있던 육체에 대한 다양성과 상상력이 풀려나고 있는 시대로 보여진다. 많은 예술가들이 육체에 대한 작품에 집중하고 있으며 성에 대한 표현의 규제도 약해지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육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얼마 전에 읽은 책 한 권이 생각이 난다. 마광수 교수는 『마광쉬즘』이라는 그의 책에서 자신이 유미주의적 쾌락주의를 인생관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골치 아픈 이성(이념적 갈등/생각)보다는 오로지 행복은 관능적 쾌감에서 나온다는 그의 관점도 틀리지 않아 보인다. 성 해방을 주장하고 성에 대한 잣대와 규제를 철폐시키고 모든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은 오히려 유혹적이다. 결국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것은 나의 육체요, 행동하는 것도 나의 육체요,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나라는 존재를 표현해내고 있는 것도 육체이니,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신, 쾌락을 추구하다 죽는 게 낫겠다는 허무주의 관점도 엿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육체에 갇혀[각주:7]  살아가므로 육체적 관능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찜찜하다. 
 과연 육체는 섹슈얼리티로서만(쾌락의 주체로서)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 앞에서의 육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영화 시간에서는 한 인간의 인생만큼의 시간에 대해 얘기했지만 나는 좀 더 큰 시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아주 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원시 시대에는 육체에 대한 제약이 없었다. '여기서는 섹스를 하면 안 된다'라거나 '성행위를 동굴 벽에 그리면 처벌받는다.'라는 감시의 눈길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육체는 삶의 행위주체 또는 생산의 도구로서의 비중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간의 습성에 의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발생하고, 지배층은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정신적 억압에 앞서 육체적 억압을 가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지금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굴레를 벗어 던지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시 육체와 정신이 굴레가 없던 예전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화일까, 퇴화일까? 
 
(사진은 저작권 관계로 링크로 대신합니다. http://modernartobsession.blogs.com/modern_art_obsession/2006/07/mao_art_buy_of_.html)
 
얼마 전에 관람한 김아타 작가의 사진전.

 
'뮤지엄 프로젝트'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유리상자 안에 담아 사진을 찍는다. 불교적 색체와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작품들을 보면서 육체는 사라질지라도 한 순간에 담긴 육체의 강렬함이 참으로 인상 깊게 느껴졌다.
 나는 '인간은 퇴화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그 동안 우리는 정신에 비해 육체를 하찮게 취급해왔다. 가까이 있는 것을 소홀히 대하게 된다는 말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념과 영혼에 비해 시간 앞에 사그라 들고 마는 육체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탓이다. 육체는 대단하다. 아무리 정신적 고취가 달콤하다 하더라도 일차적인 육체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만 할까? 정신적인 의지도 결국 육체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육체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육체를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것(퇴화)이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인간이 퇴화하지 않고 진화하는 길은 육체의 자유로움과 함께 상상력 을 더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에 장애가 있을 때, 내가 원하는 성과 주어진 육체적 성이 다를 때,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몸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은 육체 속에 갇혀서 삶을 포기하고, 동성애자는 사회의 시선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며, 노인은 육체의 노쇠와 죽음 앞에 굴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에겐 상상력이 있기에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을 열고,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영화와 예술작품을 만든다. 또한 젊었을 때만이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다양한 순간 순간의 모습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상상력은 교육으로부터 그 제한 영역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교육의 범위를 점점 넓혀갈 때 인간은 육체와 상상력을 통해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헤드윅』에서는 태초에 인간은 여성/여성, 여성/남성, 남성/남성 이 등을 맞대고 합쳐져 있었고, 제우스가 인간을 벌하려 번개로 등을 갈라 버렸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갈라진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고 있다고… 이 영화를 보면서 동성애자가 요즘 들어 많아지는 것이 아니고 억눌려 있던 이들이 다시 서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pilogue |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다양함상상력[각주:8]이 키워드인 사회이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동차, 비행기, 고층 빌딩, 우주여행과 같은 21세기의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은 자신을 이 땅 위에 서있게 하는 육체에는 많이 적용되지 못했었다. 이것은 육체를 개조하는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상상력을 뜻한다. 종교는 태어날 때부터 다양했던 것이 아니다.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기도 하고 기존의 종교에서 갈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성 역시 처음에는 2가지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여성, 남성 같은 잣대로 인간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하나의 존재, 존재마다 각각의 유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나온 자신만의 가치, 즉 각 개인이 sex가 아닌 각각의 젠더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어본다[각주:9]
 이런 이상적인 사회에서 받아들여야 할 가족은 어떤 형태를 가지게 될까 생각해보았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는 시간 앞에 인간의 삶을 영화 『시간』과는 조금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다. 영화 『시간』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소모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면, 『안토니아스 라인』에서의 시간은 가족을 만들기 위한 매개체로 표현한다. 육체를 늙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해서 다 가족이 될 수는 없다. 나는 거기에 소통이 라는 항목을 추가하고 싶다. 나는 주위에서 태어날 때부터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싸움이 나거나 서로 이해를 못 하고, 커뮤니케이션이 꽉 막혀버린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상적인 가족은 핏줄로 묶인 집단이 아닌 소통이 원활한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은 진정성과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가족의 구성원이 젠더로서 성적인 금기를 모두 없애고 서로 소통 할 수 있다면 행복한 가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의 상상력이 나만의 가치를 표현하는 젠더로서 육체를 통해 발현될 때 육체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정확히 자신의 육체만큼을 세상에 놓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만큼의 영역밖에 활동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육체보다 훨씬 높게, 훨씬 낮게, 훨씬 다르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제 단 하나 혹의 두 개의 코드로 모든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한 개인을 설명하려면 그 고유의 코드를 가져야 해석 가능한 시대,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닐까? 

THE END


참고 문헌

Book
이명희 미친년 열림원 2007 Page 123 (관련 포스팅 : 링크)
마광수 마광쉬즘 인물과사상사 2006 Page 327
IWFFIS IWFFIS 포럼 프로그램 IWFFIS 2008 Page 86

Movie
마를렌 고리스 Antonia 1995
김기덕 시간 2006
제이미 바빗 이티비티티티 위원회 2007
라스 폰 트리에 도그빌 2003
 
Forum
IWFFIS 여성의 몸을 둘러싼 생체 정치학 IWFFIS 2008

Art
김아타 ON AIR 로댕 갤러리 2008

이제 와서 덧붙이기 :
가장 좋아했던 교양 수업이다. 그래, 뭐. 나는 언제나 교양 수업이 더 좋았다. 게으르고 머리도 나쁘고 대충대충 하는 성격이 어디 가겠노.
아무튼 재미없고 왜 해야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전공수업은 포기했어도, 이런 교양 수업은 악착 같이 들었다. 별로 큰 임팩트 없는 대학 생활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다.
교수님은 자유로운 강의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내가 경험한 수업 중 그렇게 억지스럽지 않게 생성된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는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발표를 하는 학생들이 참 멋있었다. 발표를 하는 학생들은 당연히 가산점을 받았다. 수업 시간 내내 손바닥에 땀만 내고 침만 삼킬 뿐 마지막 수업까지 난 발표를 하지 못했다. 안타까웠지만 내 방식대로 열심히 했다. 그냥 재밌고 좋아서 열심히 놀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다른 시험과 달리 기말 시험 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이 수업이 내 몸과 마음을 관통하면서 얻은 생각, 상상, 기쁨을 시험지에 쏟아냈다.
발표를 한 학생들이 참 많아서 좋은 점수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발표를 한 번도 하지 못 했는데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좋은 점수보다도 내 생각이 전달되고 통했다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이 수업 덕분에 현경 교수님에 대해서도 알게되었고, 마침 교수님께서 현경 교수님과 함께 하는 콘서트 티켓을 나눠 주셔서 친구와 함께 관람할 수 있었다. 지루하지 않은 생각을 만나고 또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게 해주었다. 이 수업 때의 기억이 항상 나의 한 부분을 구성할 것이다.


  1. 웹 2.0의 대표적인 항목인 UCC(User Created Contents)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터넷을 하는 누구나 컨텐츠를 만들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헌 것은 버리고 새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본주의 개념이 '몸'에 적용 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 넓게 보면 인간의 몸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영화 '시간'에서는 여성의 몸을 위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사회 풍조에서도 남자의 나이든 몸을 '세월에 단단하게 다져진 몸'이라고 표현하는 한편, 여성의 나이든 몸은 '닳고 닳은 몸'고 표현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여성의 몸' 으로 한정했다. [본문으로]
  4. 여기에서 사회의 획일적인 시선에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고통 받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남자는 강한 남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압적 시선은 개인의 성격을 압박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이런 말들에는 "골수 페미니스트", "권위주의자", "마초", "피해의식 정신병자" 등이 있다. [본문으로]
  6. '"미감이라는 [본문으로]
  7. 결국 인간은 몸 안에 갇혀 육체가 뻗을 수 있는 범위만큼 만을 누리며 살아가므로 '갇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본문으로]
  8. 여기에서 '상상력'은 생각, 사고, 아이디어, 판단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9. 이것은 또한 금기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