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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이 안 되면? 미친년이 되고 만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겠다.


누군가는 미쳐야 미친다고도 했다는데,무슨 헛소리냐고? 내 인생에서 『미친년』이라는 책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다가 급작스레 튀어나온 말이다.


남이 말하는 것들에 끄달리며 살아가는 세상은 미친 세상이다. 단전에 힘이 없으면 그 소리에 같이 미쳐 날뛰게 된다. 그게 바로 미친 것이다. 정말로 미치지 않고 살려면 역설적으로 360도 완전히 미쳐라. 다시 자기 자리에 돌아왔으나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도록 홀딱 미쳐야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180도, 270도 미치는 건 미친 게 아니다. 270도 미치면 요술이나 부리지, 아무것도 아니다.

제대로 미치지 않으면 나 대신 다른 놈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내가 없고 남이 있을 뿐이다. 남이 칭찬한다고 기분 좋고 남이 욕한다고 의기소침해지는 건,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면, 칭찬이나 욕은 남들의 업 놀음이고 말일 뿐이다. 그 말에 내가 놀아날 필요가 없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없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고 내 생각대로 살아가면 된다. (묘지 스님)

- 『미친년221쪽


내 안의 이중성은 계속 나를 괴롭혀왔다. 이성관계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태세가 나오는 데 반해 깊은 상상 속에선 온갖 금기를 어긴 망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행동은 일반상식에 맞춰 살지만 사상은 항상 융통성 있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내가 너무 가식적이란 생각에 이른 나는 엄마에게 하소연했다. 엄마는 누구나 가식적인 면이 있다고 했지만 그후로도 나는 나의 이중성 때문에 마음에 추를 매단듯 자유롭지 못했다.


내 인간관계 처세술은 점점 상하관계를 확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상대방을 떠받쳐 주는 형태로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아랫사람이라는 포지션에 나를 안착시켜야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은 어쩐지 닭살 돋고 몸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 착각도 섞였겠지만) 떠받들여지는 걸 선호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아했다. 나는 내 발언 때문에 공간의 분위기가 전환되거나 깨어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발언을 골라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속으로는 온갖 튀는 상상들을 하면서도 실제 인간관계에 오면 나는 갈등이 싫어서 옳은 말만 했다. 분열이 싫었던 나는 그냥 모든 상황이 원래 내가 없었으면 흘러갔을 예정대로 흘러가도록 엑스트라가 되어야 했다. 나는 나와의 갈등조차도 피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였다.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베일에 싸여서 혼자만의 개똥철학에 만족하며 사는 삶을. '나는 언제나 상식적이고 올바른 편이며 정당한 사람이야. 어떤 경우에도 욕먹을 일은 없어.' 이런 혼잣말을 제귀에 발라놓고 견고한 성을 쌓았다. 내가 생각해도 역겨운 모양새다.


혼자만의 세상은 완벽할지는 모르나 그 고인물은 썩고야 말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세상과 나를 연결시키는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의 글귀는 얼마나 큰 힘을 주었던지...


'산다'라는 것은 항상 주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삶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훗날 관 뚜껑을 닫게 될 때, 또는 한줌 재로 사라질 때, '어, 이산이 아닌가베, 저 산인가베......'라고 후회하게 되리라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꽤 정형화된 사람이었다. 믿음과 현실은 늘 평행선이었다. 믿는 것을 실천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 『미친년 7쪽


자발적으로 미치지 않으면 언젠가 진짜 미쳐버리리라.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의 '상식'과 '틀'에 맞춰 내 자신을 선보이는 것을 포기하고 주체적으로 내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세상에 내던지는 '미친짓'을 지금 하지 않으면, 나는 세상이 만든 빵틀에 찍힌 모양새로 삶을 그저 살아가는 내 자신을 혐오하며 미쳐갈 것이다.


이제는 미친년으로 진화하고 싶다. 시원하게 미친년 소리가 듣고 싶다.


*


혼자 분에 차서 쓴 글은 이제 여기서 맺기로 하자. 책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책은 이명희 교수님이 9명의 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한 분, 한 분 들여다보니 평범한 인생이 없다. 물론 평범이 뭔데? 라고 묻는 다면 딱히 명확한 답은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소리 높이는 인물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말도 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세상에 소리친다는 것, 정말 힘든 일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안 그런 사람 없을 거다. 그러면서 무뎌진다. '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거지. 내가 순진했던거야.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남들만큼 사는 게 짱이다.' 

내 생각? 점점 순화되고 깎이고 맨질맨질해진다. 근데, 근데, 근데 있잖아. 가끔 울컥한다. '이거 뭔가 아닌데'. 그리고 가끔 불끈하지. '아, 이거 내 생각 맞니?'


9명의 사람들은 분명 무수히 많은 벽과 부딪쳤을 것이고, 무수히 많은 비수를 가슴에 안아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먼저 주체적인 삶을 위해 앞장 선 자들의 생생한 목소리이다. 


인물 하나하나를 다 소개하고 좋았던 구절을 다 늘어놓으려면 아마 그냥 이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냥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어떤 분들을 인터뷰했는지는 몇 번의 클릭질로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직접 해보시길.



미친년

저자
이명희 지음
출판사
열림원 | 2007-03-28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이명희의 미친년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국내외 여성 멘토 아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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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인상 깊었던 이명희 교수님의 수업시간을 잠시 떠올려 본다. 내 대학 생활에서 가장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던 수업이 바로 이명희 교수님의 <영화 예술과 육체>였다. 수업과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으면 이 책이 자신의 코드에 맞는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교수님은 페미니스트가 휴머니스트라고 하였다. 일그러진 사회구조 속에서 억압당한 건 여성뿐만이 아니다. 남성도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남자는 울면 안돼' 같은 무조건적인 남성성 강조 때문에 억압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상처받아온 사람들을 감싸고 여성 남성이 지정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균형감을 찾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남성답지 못한 남성은, 또 여성답지 못한 여성은 얼마나 많은 명시적, 암묵적 지탄을 받는지 주위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첫 수업은 남성성은 무엇인지, 여성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면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여성성을 대표하는 형용사, 동사 등)


그리고 수업 중에 영화 『시간』을 봤을 때가 있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여자를 감독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억압된 여성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불편함을 많이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다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도 김기덕 감독의 재능은 사랑한다고 하셨다.


아, 그때 그 뒷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란. 작가의 표현 방식은 뭔가 내 안의 감성을 껄끄럽게 하지만 그의 재능만은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 그 포용력에 반했고 그 말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옥 같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이 책을 요즘 다시 읽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내 생각속에 갇혀있고 자유를 갈망한다. 누구보다 날 억압하는 나 자신이라는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진정 미친년이 되는 그날까지 미쳐볼랑께.




※ 책의 많은 부분을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개인적 이득을 위해 쓴 글이 아니지만 저작권을 침해당한 관련자라면 공지사항에 있는 메일 주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