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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덕 출판 일지

숨만 쉬며 책 만들기

(제목이 좀 오버스럽다고 느낀다면 그건 기분 탓...)


저번 글은 직접 번역, 실제 출판을 할 때 돈이 어떤 식으로 들어가고 흐르는지 예를 들어보았는데, 진짜로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정도는 알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리해봤다. 나도 다시 정리할겸. (근데 정리하면서 나 이거 왜 시작했지?라는 의문이 들은 것은 비밀. ㅎㅎ)


대충이라도 알고 시작하는 게 나중에 올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뭐, 정말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번역자가 되는 '일반적인 길'이 없는 환경에서 보통 출판 번역을 하려면 겪어야 하는 과정 없이 번역을 시작하고 싶어서 지름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정 수준의 실력이 되어야 번역을 할 수 있을텐데 어찌 보면 혼자 이러고 있으니 수준 높은 번역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내가 이렇게 출판하는 것이 민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편집자에게도 원고를 한번 봐주십사 부탁도 하고 독자 리뷰도 미리 받긴 했지만.) 사람들이 자주 가지 않는 길을 택했으니 그 책임감도 무겁다. 다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책이고 아마 어떤 출판사보다 이 책에 쏟은 시간이 길다는 것만큼은 보장할 수 있다. 


잠깐 삼천포 

보통 영미권 출판사와 번역 계약을 하면 번역서를 일정 기간 내에 출간해야 한다. 보통 계약일로부터 18개월에서 24개월이다. 그리고 판매할 수 있는 기본 기간은 대부분 5년이다. 물론 계약은 연장할 수도 있지만 꾸준히 나가는 책이 아닌 이상 기본 계약 기간에만 판매한다. (번역서가 절판되거나 절판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계약해서 다시 나오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어찌됐든 출판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빨리 번역해서 최대한 많이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책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번역 기간을 넉넉하게 주지 못하는 편이다. (분량과 난이도에 따라 달라서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평균적인 단행본의 경우 3개월 정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시기를 타는 책일 경우 막 여러 번역자로 나뉘어서 한 달만에 하기도 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신뢰도 44%)


내가 슈스케에 나가서 사연팔이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업'이라는 것을 벌일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건 아니다. 내가 엄연히 사업으로 분류되는 출판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출판과 사업을 보는 시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업은 자본금이 있어야 하고 계속 성장해야 하고 적어도 10년은 유지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어떤 이유가 존재하겠지. 하지만 인류 역사를 잠시만 되돌아봐도 다수의 생각이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나는 "내가 오답은 아니다"에서 그 생각을 끊기로 했다.)


경제활동을 하고 싶은데 그게 어딘가에 고용되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일로 먹고 살고 싶을 때, 작은 규모로 유지하고 싶을 때, 잠깐이라도 경험을 하고 싶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수단도 사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이 클수록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돈을 다룰 일이 없어서 모르고 살아왔는데 세상에 내가 소유하는 것이 많아질 수록 귀찮은 일도 많아지는 것 같다(재산세, 양도소득세, 돈굴리기, 재산 관리 등등). 역시 나에게는 내 깜냥만큼 일을 벌이는 게 맞다.


나와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아마도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소꿉장난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나중에 "좋은 경험이었어요!"로 마무리되는 비싼 취미생활이라고 치부될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나의 '경험'상 '경험'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점'이다. 스티브 잡스 아저씨가 스탠포드대학 연설에서 말한 '점' 말이다. '경험'이 연결되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간다. 누군가 나에게 번역을 시켜주지 않으니 직접 번역하는 경험을 만들 수밖에. 80년 인생에 2년을 직접 번역하고 출판하는 삶으로 채울 수 있다니 어쩌면 그런 것 치고 저렴한 가격일지도 모른다.


성실하게 편집자로 살았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민연금 꼬박꼬박 넣고 돈 모아서 쬐금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가끔 여행도 조금 다녀오고 적당히 소비하며 사는 삶. 괜찮은 삶이겠지만 가끔씩, 그리고 나중에 삶이 다하는 날에 '그거 한번 해볼걸'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마도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후부터) '잘 죽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잘 죽기 위해서 가능하면 내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면 힘들 테니 아직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될 때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실패해도 한 번 정도는 더 기회가 있겠지, 뭐.  



잠깐 삼천포

출판 등록은 미리 해도 사업자 등록은 나중에 하자. 나는 에이전시에서 사업자 등록증을 요청해서 해야 했지만 꼭 사업자 등록증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중에 해도 된다. (사업자 등록은 세무서에 가서 하루만에 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의료보험을 직장을 다니는 가족의 피주양자로 올려둘 수 있다. 수익도 없는데 사업자 등록했다는 이유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을 다 내기는 어려우니까.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겠지만, 출판을 하려면 돈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혼자 모든 것을 해야하니 만큼 물질적 도움보다도 정신적으로 소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잠깐 삼천포

숨만 쉬고 살더라도 노후가 걱정된다구요? 아주 기초적인 노후 준비 수단인 국민연금은 수익이 없을 경우 사유서를 제출하면 연급 납입을 유예할 수 있다. 사업자 등록을 하면 의료보험은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전환된다. 근데 나 같은 경우에는 지금 건강보험료가 한 달에 22,000원 정도 나오니까 참고하자.


건강보험료 산정 내역(점수 곱하기 178원으로 계산한다고 한다. 내 평생 이런 것도 알게 되네.ㅋㅋ)

소득 0점

재산 44점

자동차 0점

생활수준 및 경제활동참가율 81점


여기에 장기요양보험료 1,450원을 합쳐서 산정된다. 재산은 주택이나 건물이 없는 세대일 경우 전/월세 보증금에 대해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고 한다. 월세 보증금이나 전세 보증금에 맞춰 보험료를 낸다는 말 같다.



저번에 올린 글에서 책 한 권의 원가 요소를 보면서 내가 노가다로 때우거나 생략한 것들을 보자.

보라색으로 표시한 것이 몸(내 시간)으로 때운 것.


2015/03/06 - [책덕방 출판 일지] - 1인 출판, 책덕을 따라하지 마시오



책 한 권의 원가 요소


- 직접 원가

원고료, 번역료, 편집료, 일러스, 필름 출력(표지만), 교정지 출력, 인쇄용지, 인쇄비, 코팅비, 제책비, 디자인 비용, 기타 외주


- 간접 원가

수도광열비, 임대료, 교통비, 접대비, 광고비, 물류비, 창고료, 통신비, 각종 세금...


일단 직접 원가에서는 번역, 편집, 일러스트, 디자인을 직접 했다. (또는 노예계약 맺은 와순 씨와 편집자일 때 맺은 인연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굽신굽신~)


간접 원가는 집에서 작업하므로 거의 모든 비용이 생활비로 충당된다. (생활비는 다른 곳에서 외주로 일을 해서 벌었다. 미흡한 게 많은데 일을 맡겨주신 출판사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저번에 비용을 산출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줄어든다.


선인세 : 약 200만원

저작중계료 : 33만원

필름, 교정지 출력 : 70만원

종이, 인쇄, 제책(1500부) : 35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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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만원


교통비 : 2만원 (2014년 월별 교통비는 항상 2만원 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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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월 유지비)



영업과 창고는 후에 월별로 나가기 때문에 빼놓았다.



영업 : 50만원 -> 온라인 홍보 활동, 동네 서점에 직접 찾아가는 교통비로 대체

창고, 물류 : 15~20만원


그리고 정가는 16,000원으로 정했다. (본문 1도 340쪽 / 쪽당 단가 47원) 만약 공급률이 65%라면 유통사에서 10,400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게 1500부를 다~~~ 팔면 1500만원인데 1년 안에 다 팔 수 있을지는 미지수. (만약 1년 안에 판다고 치면 월별 평균 수익은 125만원.)


시작할 때 각오한 것. 번역을 하는 동안 먹고 사는 생활비는 외주 편집으로 벌고, 소비는 최대한 줄이고, 이왕 시작한 거 즐겁게 하기.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매 예측을 했을 때 이 책은 잘 팔릴 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시작했다. 알고 시작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운 게 없었던 것 같다. 


사업이든 출판이든 쉬엄쉬엄 즐겁게. 목숨 걸고 죽을동 살동 워커홀릭으로 일을 해야 뭔가 이룰 수 있고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고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 기준에 맞추지 말고 몸 축나지 않게 여러 가지를 경험하며 살아야지.


돈 없이 출판을 시작할 때 진짜로 필요한 건 '삶의 질을 살아왔던 것보다 조금 떨어뜨려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보험 들고 연금 넣고 돈 모아서 자기 집, 차 사고 집 안에 정수기, 비데 등등이 갖추어져야 하는 삶을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고 물리적 불편함을 살짝 감수하고 살 수 있다면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하며 살 수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부유하게 살지 않았던 경험 덕분에 내가 이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곱게 자란 사람이 거친 환경에 적응하는 데 더욱 힘든 것 처럼. 그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인간이라는 적응의 동물에게 당연한 이치니까.)



653만원과 2년(+약간의 불안함) = 직접 번역해 출판한 책 한 권 그리고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 전환점


아직 제작에 들어가지 않아서 정확한 계산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감을 잡을 수 있도록 정리해봤다. 결론적으로는 한 권만 만들더라도 비정기적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하면서 준비하면 크게 손해보지 않고 책을 만드는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소극적 출판이라고나 할까. 출판을 천년만년 지속할 수 없을지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삶과 엮어보고픈 책이 있다면 한번쯤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