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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덕 출판 일지

혼자 출판을 한다는 것

규모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3년 동안 일하다가 문득, 마치 다 쓰여진 소설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편집 일은 재미도 있었고 많진 않지만 보람도 있었다. 설립된 지 10년 정도 된 회사는 규모에 비해 탄탄했고 복지도 나쁘지 않았다. 박봉도 아니었고 야근도 없었고 근무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3년 째가 되자 가슴속 답답증은 심해져 갔다. 일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에 빠졌다. 처음엔 배가 불러서 딴 생각이 든다고 생각했다. 누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3년차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까? 날이 갈수록 경기가 안 좋아지는데 대체 뭘 하겠다고 딴 생각이 드는 것일까?

새로운 책을 쓰듯이 인생을 살고 싶다. 회사에서의 삶은 도무지 내 손에 펜이 쥐어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완결이 나버린,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 속에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밑천도 없고 가난했다. 몸에 밴 가난한 습성 때문에 빈약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물질적 가난함이 내 정신적 가난함마저 만들어낸 것이다. 

엎치락 뒤치락 고민 끝에 나온 결정적 한 방은 '나중엔 더 못해'였다. 어릴 때부터 해보고 싶다고 혼잣말만 되풀이하던 일을 진짜 '내 일'로 만드는 전환점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되고 싶고 만화가가 되고 싶고 번역가가 되고 싶은 자신에 만족한 채 글을 쓰지도 만화를 그리지도 번역을 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기는 싫었다. 

어쩌면 내 깜냥이 아닌지도 몰라. 종종 나를 슬프게 하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보고 들은 지식 때문에 내 그릇은 생각 못하고 눈만 높아져서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머리만 쿵쿵 찧으려 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 해도 천재를 넘어설 수 없는 평범한 그릇이라 열등감에 똘똘 뭉쳐 일만 벌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혹독한 자기검열은 되풀이됐다.

간장종지만한 그릇이면 어떠랴. 차라리 이 나이에 깨지고 자기 분수를 알게만 되도 큰 소득이 아닐까.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끝까지 해본 게 있었나? 한계까지 밀어붙였던 게 있었나? 한 가지를 끈덕지게 못하는 성질도 있지만 맨날 남탓만 하고 대충대충 살지 않았나? 망하든 쪽박을 차든 내 이름을 걸고 끝까지 해보자. 

결국 발을 내딛게 한 것은 용기가 아닌 오기였다. 


그렇게 마음이 붕뜬 채로 일을 하다가 미란다의 책을 만났다. 미란다 하트. 그녀는 영국 코미디언이자 작가이다. 나는 시트콤 <미란다>로 미란다를 알았다. 진지한 상황을 못 참고 찌질함을 표출하는 그녀의 개그가 참 좋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모든 이에게는 선과 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찌질 본능이 있지 않나? 그걸 잡아낸 미란다를 흠모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미란다가 쓴 책을 만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이었는데 일단 시작을 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일이 전개되었다. 사실 아직도 긴가민가 하다. 혼자 모든 것을 하다 보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진짜로 책이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두려운 것도 참 많다. 비빌 언덕도 마땅치 않은데 일을 벌인 탓에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끊기는 일은 마음에 은근한 충격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이지만, 가난함은 일상생활을 궁핍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일생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려고 할 때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은 부모님, 주변 사람, 사회적 시선보다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가난한 잣대다. 

'저런 건 돈 있는 사람들이나 하지' '이걸 저질러서 망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돈도 없는데 그냥 살자' 

벼랑 끝 선택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명이나 직함을 벗어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출판이 내 목적도 아니고 돈도 내 목적이 아니다. 나는 내 가치를 찾고 싶다.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을까? 그 가치는 누가 평가하는가? 내가 그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직 내 가치를 긍정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싶다는 그 욕심은 결국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대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는 홀로 방에 누워 누군가 나를 '간택'해 주길, 누군가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길, 누군가 나에게 투자해 주길 문득문득 바라곤 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지금도 누군가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 맛 본 인정 받는다는 순수하고 황홀한 기쁨, 그게 고프다.


어떤 사람은 자신감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 한때 자신감이 있는 척,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포장지로 나를 둘둘 싸보기도 했지만 영 안 맞는 포장지였음이 드러났다. 다른 이에게 인정 받으려면 나라는 평가자를 만족시켜야 할 것 같다.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배수의 진을 쳤다. 도망 가지 말고 해봐라.


그래서 오늘 나는 혼자 출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