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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 릴리프 시리즈/미란다처럼

아직 우리에게는 미란다가 더 많이 필요하다

유치해도 쪽팔려도 사랑스러운

미란다처럼



나이 38, 185cm, 종종 아저씨로 오해 받는 싱글 여성. 영국 시트콤 <미란다>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웃기는 여자 캐릭터 미란다가 등장한다. 몸만 컸지 사회 부적응자 냄새가 폴폴 나는 어른아이인 미란다는, 있는 돈을 다 털어 장난감 가게를 차리고 제발 아무 하고나 결혼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다니며 쪽팔리는 짓만 골라 한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거나 옷가게 쇼윈도에서 마네킹인 척 서 있다가 구경하는 사람을 놀래 키거나 진지한 면접장에서 머릿속에 맴돌던 노래를 크게 불러재낀다거나 공공장소에서 실수로(?) 웃통을 훌러덩 벗은 후 멋쩍은 웃음을 날린다.

그런 미란다를 보면서 ', 엄청 유치해...'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웃고 난 후, 내 마음은 나도 어른인 척하기가 너무 힘들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분명 어릴 때는 준비하지 못했던 어른의 세계이건만 다른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걸까? 하이힐이 편한 척, 웃긴 상황에서도 웃기지 않은 척, 어려운 뉴스를 알아듣는 척하고 말이야. 물론 눈치껏 남들처럼 똑같이 행동하면 주목 받지 않고 살아갈 순 있겠지. 하지만 쪽팔림을 한껏 드러내며 웃음을 자아내는 미란다의 삶이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미란다의 못말릴 정도로 찌질한 웃음 코드에 매료된 후 미란다를 덕질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미란다>는 주연 배우이자 각본가이자 공동 프로듀서인 미란다 하트의 반자전적인 이야기였다.

어느 날, 우연히 미란다의 얼굴이 커다랗게 찍힌 <Is It Just Me?>라는 책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원서를 구입해 읽어 보았다. 너무나도 미란다스러운글이었다. 미란다를 더욱 좋아하게 된 나는 감히이 책을 직접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란다처럼>은 전반적으로 시트콤 <미란다>의 캐릭터를 그대로 이어받은 코믹 에세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란다는 어릴 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만 남들이 비웃을까봐 겉으로는 정치인이나 운동선수처럼 그럴 듯한 장래희망을 말하며 자랐다. 꿈조차 남의 눈치를 보며 꾸어야 했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남을 웃기고 싶었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미란다는 2년 동안 공황장애를 앓다가 조금씩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기 시작한다. 작은 무대와 단역을 맡아 하던 미란다는 서른여덟 살에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건 시트콤을 만든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열여덟 살 미란다에게 말을 건다. (책에서 진짜로 말을 건다.) “남들이 그럴 듯하다고 하는 가짜 꿈 말고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솔직히 생각해봐!”

나는 이 세상에 다양한 롤모델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예쁜 여자 롤모델은 많다. 여자아이들에게 예뻐지는 법을 알려주는 방송과 책도 많다. 하지만 웃기는 여자 롤모델은 많지 않다. 미란다는 책에서 부풀려진 다이어트 산업과 미용 산업을 신랄하게 웃음거리로 만들고 피부가 좋아지려면 글레이즈드 도넛이나 먹으라는 유머를 날린다. 예쁘다는 항목 외에도 여자라는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가령 유머라든지) 있음을 미란다를 보며 되새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 눈치 보지 말고 말달리기는 나 자신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다. “눈치 보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자!”

가끔 <미란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글을 접한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수식어는 사랑스럽다는 표현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유행하는 옷을 입지 않아도, 몸매가 좋지 않아도, 말투가 나긋나긋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여자. 아직 우리에게는 미란다가 더 많이 필요하다.


- 빅이슈 116호 기고글